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322)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우리 모두는 보이는 “나”와 보는 “나”의 두 관점을 갖고 산다.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의 다른 말의 표현이다. 내가 보는 것,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남이 나를 보는, 보이는 내가 같이 존재한다. 보통 보는 나와 보이는 나에게서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내가 보는 것보다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보고 생각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살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내 소신과 생각이 뚜렷하여 영향받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남이 자기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생활에 영향을 받는 경우도 많다. 그것이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객관적 평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다른 사람의 평가는 나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자동차의 선팅이라고 한다. 진한 색으로 운전자의 모습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내부가 보이지 않게 한 선팅은 차 안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운전자의 행동이나 표정을 볼 수 없어 꼭 필요한 경우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본인은 가려져 있으니 자신이 노출되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내보이지 않으려는 방어수단이나 위급상황에서 운전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밝히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경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못 밝힐 것이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다. 살아가면서 접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 부류로 나뉘는 것을 경험한다.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 또는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상대에게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될 수 있으면 내 속내를 나타내지 않고 생각을 감추거나 행동을 있는 그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산다. 특히 대중의 눈을 의식해야 할 연예인, 정치인의 경우 내 사생활을 있는 그대로 밝히기를 극도로 꺼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있는 그대로를 밝히는 경우 자기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리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선팅과 같이 베일에 가려 진정한 자기 모습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다.

거짓말은 자기 감춤의 대표적인 수법이다. 진실이 있는데도 그것을 가리고 다른 얘기나 행동으로 진실을 감춘다. 진실을 밝혔을 때 곤란함에 빠지거나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밖으로 내보이는 나와 내 마음속의 나, 즉 내 양심에서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르니 스스로도 괴리를 느끼지 않을까 여겨진다. 동물에서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본다. 종달새가 알을 품고 있는데 둥지가 노출되는 위험에 처한 경우 일부러 날지 못하는 듯 절룩거리며 달아난다. 그것을 본 추적자는 그 새를 쫓아가게 되고 이렇게 되면 알이 있는 장소를 벗어나게 된다. 이 새의 행동은 계산된 위장술이며 자기 자손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 수단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본능보다는 계산된 행동이 더 많은 것을 본다. 거짓말은 보는 “나”가 아니고 보이는 “나”를 생각한 위장술이다. 진실은 내 마음속에 감추고 밖으로 다른 것을 내보여 상대에게 다른 생각을 갖도록 유도한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동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나 자기 이익이나 쥐고 있는 권력 등 소유한 것을 지키려는 계산된 말이나 행동은 대부분 지탄의 대상이 되나 금방 밝혀지는 경우가 많지 않고 그 현장을 벗어나면 쉽게 잊히게 된다고 생각하나 보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기나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들, 그럴듯한 말로 상대를 속이는데 이들은 보이는 나를 가장 잘 속이는 대표적인 예이나 이 경우 양심의 소리를 들을 마음에 공간이 없고 설혹 그럴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철저히 무시해 버린다. 어찌 보면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인성을 가졌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일생 살면서 크고 작은, 진정한 내 마음속 말만을 하고 살기는 어려우나 넘지 말아야 할 경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일 것이다. 내 행동이나 말에 의해서 상대가 해를 입게 될 때도 전연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파렴치의 경지에 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심히 걱정스러운 세대에 살고 있다. 성현들도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은 알겠으나 인간에게는 이 판단기준으로 양심을 앞세웠다. 나를 내가 보는 눈이다. 이제 이 어려운 시기에 내가 나를 관찰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춰야 할 때라고 여긴다. 양심의 복원이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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