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 (318)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그냥”,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 영역으로 나눠질 수 있을 것 같다. 뚜렷한 의미 없이 상황에 맞게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 즉 가볍게 넘어가고 싶을 때 “그냥”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없고 자기 주견이 없음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적 반응, 사리 판단을 하기 전에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앞뒤나 이성적 판단 없이 행동할 때 보통 “그냥” 그렇게 했다고 얘기한다. 자기의 뚜렷한 의지 없이 “그냥”을 남발하는 경우 줏대 없는 사람이란 인상을 줄 수 있고, 어느 편에도 서기 어려울 때 면피하려는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즉 특별한 자기 의견이 없을 때, 혹은 난처할 때 두루뭉술하게 자기 의견을 감출 때도 쓰는 말이다. 

그러나 본능적 반응으로 나오는 그냥이란 말은 차원이 다르다.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자기 위험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거나, 불행한 경우 자기도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 아이를 구하고 나온 그분에게 왜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었냐고 예에 어긋나는 질문을 하면 보통 “그냥”이란 대답과 함께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냐고 되묻는다. 그렇다. 이런 행동은 인간의 본성,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앞뒤, 위험을 뛰어넘는 인간으로서 할 일을 했다고 여긴다. 지금도 많은 일본 사람들의 존경 대상이 되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가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한 취객이 실수로 선로에 떨어진 것을 뛰어들어 구하려다 같이 사망한 사건을 기념하여 지금도 추모 행사를 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었지만 생존해 있다면 그 이유를 물으면 아마도 “그냥”이란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너무 자주 접하는 소방관들의 헌신적인 활동을 보면서 숭고한 인간의 본성을 느끼곤 한다. 화마가 덮치고 있는 불 속으로, 그 안에 갇힌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뛰어드는 모습은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소방관의 머릿속에는 위험에 처한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 외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간의 본래 본성인 착한 마음을 누구나 마음속에 갖고 있음을 믿는다. 그 본성이 살아가면서 세파에 깎이면서 무뎌지고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의 이해관계가 기준이 되어 행동하는, 참으로 야박한 범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에서 지지하는 대상이 다를 때 친한 사이에 가끔 묻는다. 왜 그 집단을 지지하느냐고. 간단한 대답. “그냥”. 이런 답을 들을 때 과연 어찌 반응해야 하는지. 복잡하고 민감한 사항에 대하여 내 의견을 아주 자연스럽고 쉽게 숨길 수 있는 좋은 방법임을 알아가고 있다. 아마도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말이겠으나 일상생활에서도 무난히 어려운 상황을 파해가는 좋은 수단이 아닐까 여기는데 내 본성과는 잘 맞지 않는다. 옳고 그름, 그리고 내 소신을 떳떳이 밝히고 상대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때 서로 토론하고 그 차이점을 알고 조정해야 되지 않을는지. “그냥”으로 얼버무리면 상대의 진정한 뜻과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고 결국은 합의된 결과를 얻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때에 따라서는 정확히 자기의 뜻을 밝히고 상대의 의견도 진솔하게 받아들여 합의점을 도출하거나 최소한 상대의 뜻을 알아야 일을 원만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의 태생적 본능을 갖고 태어났다. 누구 하나라도 외형에서 완전히 같은 사람이 있는가. 서로 다른 사람의 생각도 같을 수가 없다. 이들 생각의 최대 공약수를 끌어내고 대중이 지지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려 최대 수가 만족하도록 해야 한다. 공자님 말씀에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배는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했던가. 자기 소신을 지키면서 이를 떳떳이 밝히고 상대의 의견도 존중하는 서로가 되었으면 한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관련기사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저작권자 © 토토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