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73)

내가 살았던 시골집에서 키웠던 개는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친구요 벗이었다. 밖에 나들이에는 항상 같이했고 들판 나가서도 개가 앞장서서 갈 길을 정하였다.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던 개는 수천 년 우리 인간과 함께하면서 봉사하고 마지막은 자기 몸까지 인간의 먹이로 제공해 왔다. 올해 이 개가 가축의 범위를 벗어나 도축이나 식용으로 할 수 없게 법으로 정해졌다. 3년의 유예기간이 있긴 하지만 아마도 지금부터 영향이 있을 것이다. 보신탕을 즐겨 먹어왔던 마니아들이나 병후 빠른 회복을 위하여 양질의 단백질을 공급받아야 할 환자들은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긴 식용 개와는 크게 다르지만, 애완견의 숫자가 천만을 넘고 가축병원과 애완동물 호텔, 장례식장까지 별도로 갖추고 있으니 대우를 달리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자연 순리로 오는 변화라 여겨진다. 지금도 개 사육 농가나 식용금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제 입법까지 된 상황에서 순리에 따르는 방법밖에 없게 되었다. 애완동물 먹이에 연관된 펫푸드 시장규모도 1조 원을 넘어서고 있으며 경제적 측면과 아울러 애완동물이 사람들에게 주는 정신적 위안과 반려의 역할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이다. 1인 1가구 숫자가 세 가구 중 한 가구인 상황과 급격한 노령화 현상으로 사람들이 정을 붙일 대상이 점점 없어지는 현실에서 반려동물은 삶에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혼자일 때, 그 외로움은 극복하기 어려운 처지가 된다. 그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은 살아있는 애완동물이 해결해주니 얼마나 대견한 존재인가. 사회구성원의 변화와 노인 세대의 증가에 따라 애완동물의 수는 늘어나고 종류도 훨씬 더 확대될 것이다. 그만큼 수요가 증가할 충분한 여건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애완동물과 교신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주고받는 애정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애완동물의 특징, 주인에게 절대복종하고 주인의 의사를 읽어 즐겁게 해주려는 애틋한 정은 서로 감응되어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기도 한다. 애완동물 사랑은 사람 간의 여러 관계나 보살핌, 마음 씀이 점점 옅어지는 우리 일상생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계속되는 각박한 사회 여건은 심한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으며 같이 생활하고 있는 사람 간의 관계도 인정이 통하지 않는 삭막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애완동물은 어느 때나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며 그 의사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순종이 몸을 벤 행동으로 주인을 섬긴다. 이런 대우를 어디서 받아 볼 것인가. 이제는 퇴근하면 자녀나 아내보다도 먼저 나와 반기는 녀석이 반려동물이 되었고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려동물을 거느리는 데는 상당한 경제적 부담과 시간 할애가 필요한 것은 현실이나 이건 부담보다도 정신적으로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계산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주된 이유가 될 것이다.
먼 지난날, 대가족이 한집안에서 살았을 때의 우리 집안의 상황, 시골 큰 집에는 개와 돼지, 소, 염소 등은 없어서는 안 되는 가축이었고 이중 어린 우리와 가장 잘 어울려 놀 수 있는 대상은 개였다. 강아지를 이웃에서 얻어다(그때는 서로 새끼를 분양해 주었다) 키우기 시작하면 몇 년씩 정이 든다. 보통은 줄에 매어 놓지 않고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으니 어린아이들과는 뜀박질 동료요, 놀이에서도 빠질 수 없는 상대가 되곤 하였다. 학교에 갔다 와서 놀이터나 들녘에 나갈 때는 우리 개가 항상 동행했고 여러 놀이에 상대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호적에는 올리지 못했지만 독특한 이름이 지어졌고 언젠가 헤어질 때까지 그 이름은 모든 우리 가족 구성원들에게 한 식구처럼 대우받았고 그의 이름이 불리면 쏜살같이 다가와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면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이런 추억 속에 지금도 가슴 아린 기억, 개가 어느 정도 커서 성견이 되면 보통은 소나 돼지와 꼭 같이 팔려나가게 된다. 소나 돼지는 시장이 있었으나 개는 동네를 찾아오는 일컬어 “개장수”에게 넘기곤 하였다. 개장수가 동네에 뜨면 요란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불안해하는 개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개도 낌새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지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키우던 개도 성견이 되어 개장수에게 넘길 때가 되었다고 부모님이 여겼나 보다. 어린 우리들의 강한 반대에도 재정적으로는 가정 살림에 보탬이 되니 부모님 입장은 어쩌겠는가. 묶어놓지 않은 우리 개를 가장 잘 따랐던 누나가 부르니 그 험악한 상황에서도 우리 곁에 서서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주인에 대한 무한 신뢰를 그때 느꼈다. 개 줄이 목에 채워지고 짐칸에 실리는 순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개를 불러왔던 누나에 대한 원망과 함께. 그런데 그때는 개는 가축이었고 때가 되면 판매하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가슴 아픈 이별을 뒤로 남기고 우리 곁에서 사라지곤 했다. 개의 가장 큰 결점은 주인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다.
지금도 애완견을 목줄로 매어 끌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놀아야 할 짐승의 본능을 억제하며 주인의 의사에 따라 복종하게 만들고 있으니. 반려동물이 인간의 수요에 부응하며 한 집단을 이루고 있으니 이런 사회현상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언젠가 반려동물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하여 외롭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이를 극복할 것이라 굳게 마음먹고 있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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