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78)

얼마 전 나이 드신 분을 만나 얘기하다 보니 그분의 마지막 남은 소망, 수명을 다하고 늙음에 이르러 어느 날 앉아서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 남은 유일한 바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고종명 생탈입망(考終命 生脫立亡)이다. 생(生)이 있으니 멸(滅)이 있다는 자연의 순리를 모르는 사람은 철들기 전 어린이를 빼고 없을 것이다. 무슨 인연인지는 잘 모르나 어쩌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까지는 받아들이겠는데, 잘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무언가 섭섭하고 아쉬우며 미련이 남아 조금이라도 이 생에 더 있고 싶어 온갖 허망한 노력을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잠깐 연장은 가능할는지 모르겠으나 결국 헛수고였다는 것을 알고 어느 날 끝을 맞는다.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항상 궁금하였다. 모두 극락, 천당이 천국으로 그렇게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듣는데, 그 좋은 곳에 갈 수 있는 기획가 주어졌는데 구태여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해야 할 이 생을 왜 떠나기 싫어하는가를 알기가 어렵다. 그냥 내가 살아 있고 친숙하며 모아놓은 재산과 가족 등, 이런 모든 것을 놓고 떠나려니 미련이 남는 것인가, 아니면 친숙하고 정이 든 내 집을 떠나기 싫은 감정의 표현인가.
아무튼, 어느 이유이건 지금 내가 갖고 있고 생각하는 이 몸뚱이도 탈탈 털고 마무리를 하는 시간이 올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고 온갖 노력을 다해도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우리 선조들에 비하면 지금 인간의 평균 수명은 2배가 넘었고 조금 지나면 그 이상을 살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죽음을 막아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끔찍한 예상을 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잔인한 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데, 이제 나이를 먹어서 이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옳은 얘기라 공감이 된다. 갖고 있는 것, 지금 누리는 것이 영원하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 없이 시간을 좀 먹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젠가는 있는 것이 없어지고 가진 것, 생명까지도 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창조주의 배려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소유에서 가짐의 속박을 털고,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훨훨 자유로움을 찾아가는 여행, 그 여행이 다른 세상인지, 그냥 사라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갖고 있는 것, 물적, 정신까지도 그들이 주는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얼마나 큰 자유를 우리에게 준 것일까.
그러나 생명까지 포함하여 가진 것에 어찌 미련이 없으랴. 여러 아쉬움이 마음속에 남아 다 놓아 내리지 못하는 아집,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내 소유가 모두 부질없다는 욕심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가끔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순간을 경험한다. 내 몸뚱이와 생각하고 있는 ‘나’. 지금 있는 그대로 더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재물, 돈, 여러 욕심 등은 이 순간에 결코 나와 같이할 수가 없다. 그저 저만큼 떨어져 있는 흘러가는 구름과 같은 것이 아닐까.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대상으로 잡으려 계속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갑자기 허망해진다.
현실이 나에게서 떠나 피안의 또 다른 내가 개체화하여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상은 자아를 내려놓는, 무(無)의 세계, 깊은 명상에서나 잠깐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놓아 버린 상태, 그 경지는 진정 무한의 세계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끌고 살아왔던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 영의 세계로 전이되는 것이 탈망(脫亡)이 아닐까. 그래 지금 갖고 있는 물질적 애착, 욕심 같은 정신적인 부담 같은 것도 탈탈 털어 버리고, 진정 자유인이 되는 것은 생의 마감, 죽음밖에 없는 것인가. 지금 현실에서 생탈입망 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가끔 종교계 성현들의 최후 순간을 전해 듣는다. 내가 직접 목격하지 않고 전해 들었는데, 어느 정도 진실인지는 불경스럽게 알 수 없으나, 마지막 순간에 홀가분하게 남은 생을 허물 벗듯 하였다고 하니, 정신이 육체를 완전히 지배했다고 여겨진다. 정신력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여겨진다. 가끔은 무념무상의 경지에 스치는 듯 지나기도 하지만, 없는 것이 있는 것,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성현의 말씀을 반추하면서 살고 있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관련기사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