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65) 

전기가 우리 일상으로 들어오기 전, 호롱불은 밤을 밝히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물론 등유로 석유가 이 나라에 수입된 이후의 일이며 그전에는 여러 씨앗을 압착하여 얻는 들기름 등 식용기름이 불을 켜는 역할을 하였고 여유가 있는 집은 벌집을 이룬 밀랍을 이용한 초가 있었으나 일반화되지 않았다. 산간에서는 관솔이 좋은 광원이 되었다. 끄름이 문제였지만 이런 수단으로 하루 중 반절이 넘는 어두움에 묻힌 시간을 활용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다. 이런 불빛에 의해서 인류의 물질, 문명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나와 같은 세대는 관솔의 혜택까지는 받지 못했지만, 석유를 이용하는 호롱불은 지금도 눈에 환하게 기억이 된다. 학교 교육을 받기 전부터 저녁 밝음은 호롱불에 의지하였고 전연 거부감이 없이 친숙한 불빛이 되었다. 대학 입시를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할 때도 호롱불은 항상 나와 함께하였다. 그 예의 호롱이 지금도 내 집, 수집함에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마도 의식하지는 못할는지 모르나 매일 눈으로 접하고 있다. 호롱의 꼭대기 심지를 통하여 불이 붙을 곳에는 석유가 탈 때 만들어진 그을음이 진한 검은색으로 지금도 연연히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석유와 닿게 만든 심지의 높낮이로 불의 크기를 조절하고 그을음이 나지 않도록 조정한다. 

호롱불은 전기 빛과는 크게 다르게 자극적인 빛깔이 아니라 순하고 은은한 불빛을 내어 모두에게 친근하다. 물론 크게 밝지는 않지만, 저녁 어둠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밝기이다. 호롱 불빛의 백미는 창호지에 투영되어 밖으로 새나갈 때 밖에서 느끼는 아늑함이다. 창호지와 호롱 불빛은 너무나 궁합이 맞는 서로이다. 창호지 틈새로 비집고 나오는 연한 불빛은 살아있음을 은근히 표출하면서 사람이 사는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여름 한가롭게 담장에 걸쳐 피어나는 호박꽃의 빛깔을 닮아 자연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호롱불이 은근하게 비치는 농가의 창호지를 바른 창문을 바라볼 때는 삶이 이어지는 우리의 생활이 그곳에 있다는 것에 따뜻한 마음이 머문다. 전기로 밝히는 그 불빛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은은함이다. 남녀 간의 사랑도 눈 부신 전깃불 밑에서보다 은은한 불빛, 촛불 밑에서 더 운치가 나지 않는지. 분위기를 띄우고 따스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연인과 만남 장소는 전깃불 대신에 촛불이 제격이다. 
 
이제 전기가 닿지 않는 산간벽지를 제외하고 호롱불을 사용하는 가정은 없어졌지만, 전깃불 대신 좀 더 감정을 부드럽게 하는 불빛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호롱불이 밝지는 않았지만, 그 밑에서 글을 읽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고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데서 내 자리만이 조명을 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 속담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지금도 측근의 잘못이나 믿었던 사람이 실망을 주었을 때 곧잘 이용하는 이 속담을 위에서 조명하는 전깃불 밑에서는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호롱불이나 촛불은 받침의 높이가 있고 그 받침 밑에는 당연히 불빛 닿지 않아 어둠이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아주 이해하기 쉬운 속담을 곧잘 인용하고 측근의 속마음을 에둘러 떠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녁, 어둠이 우리 공간을 차지하는 시간, 그 어둠을 물리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불을 방 안으로 끌어들이거나 그것도 어려울 경우 그 옛날에는 겨울눈을 쌓아놓고 그 반사 빛을 활용하는 슬기를 발휘하기도 하고 반딧불이를 조명수단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형설(螢雪)의 노력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얘기는 반딧불이나 쌓아놓은 눈의 빛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지금의 성과를 얻었다는 비유의 말로 활용하고 있다. 그 당시 책들은 대부분 활자가 커서 읽기가 쉬웠고 지금과 같이 잔글씨로 된 책은 아이도 형설의공(螢雪의 功)을 쌓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밤에 밝히는 불빛은 우리 생활의 시간 범위를 넓혀주었고 삶의 폭을 훨씬 확대 크게 기여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으로 치부하다 이런 빛과 밝음을 얻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형설의공이 있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많은 사람, 우리 조상들과 원래 삶을 같이하고 있는 동시대의 동료들의 큰 노력과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축복이다. 이제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혜택이 나 아닌 모든, 내 주위, 선배들의 노력 결정체라는 것을 서서히 느끼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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