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명예교수의 살며 생각하며(284)

누구나 나이 먹는 것을 바라겠는가. 10대를 예외로 하고. 일생 청년으로 살기를 희망하는 것은 그저 바람이지만 불로초를 구하는 것만큼 허황된다는 것은 모두 안다. 그래도 청춘의 시기에는, 나는 늙지 않고 이렇게 항상 팔팔한 청춘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큰 착각에 묻혀서 살기도 한다. 모든 이 세상 생물이나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시간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여 생성이 있으면 소멸되는 천고의 진리를 역행한 경우는 없다. 스스로 나이 먹고 늙어 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임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최선이다.
근래 나이 들면서 젊었을 때 느끼지 못한 실로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산다. 그래서 나이 먹음은 슬픔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살, 한 살 먹는 것은 등산에 비유된다. 산 아래 있을 때는 그 낮은 주변만 보이는데 오르면 오를수록 더 먼 곳을 볼 수 있고 더 많은 곳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는 아니어도 크게 전체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저 건너 개울이 보이는가 하면 한 번도 발로 밟아보지 못한 저 멀리 넓은 평야와 같이 붙어있는 농촌 마을도 보인다. 내가 알지 못했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경치를 볼 수 있으랴. 이는 산천의 얘기이지만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젊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주위의 경치와 주변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한 번도 내 눈길을 끌은 적이 없었다. 그저 내일, 내 가족, 내 직장의 일 만을 생각했고 주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무관심하게 지냈다는 것을 지나놓고 보니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움직임은 둔해지고 육체의 활동은 정상에서 멀어지지만, 생각과 관찰능력은 훨씬 예민해진다. 지나가면서 새로 나온 어린 새싹을 반가운 마음으로 마주하며 이른 봄, 땅 가장 가까운 곳에서 수줍은 듯 꽃망울을 내미는 별꽃과 눈 맞추는 것도 나이 들어서 습관화된 행동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가슴속으로 기쁨에 차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특히 자연의 변화에 예민해지고 아파트 좁은 공간의 화단에 막 올라오는 원추리의 새싹은 얼마나 반가운지, 작약의 붉은 새순은 새봄, 한 해를 시작하는 초입에서 또 다른 환희의 기쁨이 인다. 어제까지 아름다움을 뽐내던 목련 꽃잎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어깨 내려 손에 쥐고 아쉬움을 전하며 내년에 후손을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한쪽에는 라일락 연초록색 꽃망울이 나 여기 있다고 속삭인다. 그리고 그 매혹적인 향기를 머릿속에 미리 불러와 준다. 이런 관찰과 느낌은 나에게 세월이 가르쳐준 관능이고 새로운 기쁨을 주는 큰 혜택이다.
세월의 자취인 나이는 우리에게 의외의 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변화에도 반응할 감각을 주었다. 귀는 어두워지고 눈은 흐려지지만 마음속 심안(心眼)은 더욱 예민해짐을 느끼면서 산다. 육체적 상실을 정신적 큰 혜택으로 되돌려 받는 기분이다. 이런 변화를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자연이 나에게 준 큰 변화이고 가는 아쉬움을 달래려 신이 늙어가는 사람에게 그에 걸맞은 선물을 주는 것이라 여긴다. 그 선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노후는 행복하게 살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 상태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오늘은 가고 내일이 온다. 또 하루, 나이를 먹게 된다. 가는 것만큼 나에게 다른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주는 보상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자연의 섭리, 큰 흐름을 결코 거역할 수는 없다. 이 변화를 슬기롭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현명한 처사요 나를 편하게 하는 방편이 된다. 거부한다고 미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섭리대로 가고 있다. 우리는 타고 있는 기차의 속도를 내 마음대로 늦출 수 없듯 큰 흐름에 나를 맡기고 그 지나감을 최대한 즐기는 슬기를 발휘해야 할 때이다. 우리 삶, 인생을 더 깊고 좀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마음의 자세를 갖추도록 나를 다독거려야 하겠다.
아침 오는 길, 수선화 꽃과 눈 맞추고 그 싱싱한 꽃잎과 잎사귀에서 젊음의 정취를 느끼며 생명의 신비함을 흠뻑 함께한다. 이런 교감이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젊었을 때 지나쳤던 그 아름답고 신비함을 지금 느끼고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런 감각을 나에게 준 창조주에 감사, 또 감사할 따름이다.
신동화 전북대 명예교수
관련기사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